자본주의는 국가주의다.
국가주의는 인권마저 지배한다. 그러한 국가주의에 대한 극복도 결국엔 사회가 왜곡하고 있는 동물로서의 인간을 회복하는 곳에 있다.
인권 침해를 극복하는 것은 결국 동물권이다.

열로 인식하는 뱀에게, 소리로 인식하는 박쥐에게 인간이란 존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만을 덜어내고 신비를 믿는다면, 인간이 만날 수 있는 동물권은 오로지 인간으로서의 동물권 뿐임을 알아차린다.
그렇기에 인간 동물권이 없는 동물권은 단지 배타적인 자기 정의의 확장이 되기 쉽다. 단순한 자기 확장을 극복하는 것은 결국 인권이다.

동물권과 인권은 서로 다른 것, 서로 배타적인 것이라는 인식은 학습의 결과일 뿐이다.
종차별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은 인간이 탈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동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인간이 서로의 생명을 지탱하는 고리 속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인간다움은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 일은 사실 언어화된 곳에서가 아니라 소리마저도 제거되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복지농장은 현실적 대안인가? 어쩌면 그런 생각 자체가 인간의 동물성을 잃어버린 인식이다. 그것은 마치 시설이 현실적 대안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시설 복지와 같은 것이 바로 언어의 세계다. 반면 제거되는 비명의 세계에 서 있다면 사회는 언제나 거기 서있는 존재들에게 불법의 프레임을 씌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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