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이용하는 말이 관리를 잘 받으면 야생보다 먹이 제공, 질병이나 천적에 대한 보호, 평균 수명에 있어서 이득이 있을 수 있다.

(1) 그런 기준으로 평가하는 인간은 자기 스스로도 노예화 되는 것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더 안전하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보장은 더 작은 약자들에 대한 더 큰 파괴와 착취의 사회를 통해 얻는 것이다.

(2) 현대 문명은 소유의 눈으로 바라보도록 학습시킨다. 저 말이 소유한 것으로 행복을 변명한다.
그러나 소유됨의 눈으로 본다면 전혀 다르다. 저 말은 어떤 서식처에 소유되었는가? 어떤 생태에 소유되었는가?

(3) 비인간 동물의 다름과 소수자성이 착취의 근거가 된다면, 그것은 반드시 모든 타자에 대한 차별로 이어진다.
단순한 비건 실천이 정확한 답이 될 수는 없다. 농장물을 키우던 외국인 노동자는 비닐하우스에서 인생을 박탈 당한다.
내가 어떤 정의를 소유하는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우리 사회는, 나는 어디에 소유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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