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물권으로서의 인권

인간 중에 제일 불쌍한 사람만을 찾아 돕는 것이 인권이 아니다.
비가시화 되어 내몰리고 억압 당하는 문제와 싸우는 것이다.

동물권 운동은 불쌍한 비인간 동물을 돕는 것이 아니다.
비가시화 되어 내몰리고 억압당하는 문제와 싸우는 것이며,
거기엔 인간 동물도 포함된다.

인권 운동과 연대를 동물권 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어쩌면 종차별적 인식이 있을 수 있다.
동물권은 나눠먹는 파이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 노동 인권을 위해 여성 인권을 나중으로 미루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돕는 일이 동물의 현실을 가리는지 오히려 드러내는지를 살펴보면 될 일이다.

[2] 동물로서의 인간

인간은 어쩌면 구해줄 필요가 없는 존재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구해주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면서 딜레마를 경험한다. 인류는 결국 돌이키지 못할 것이며 지구채로 망할 운명이다.

그런데 이건 사실 가치 판단이다.
인간은 다양하게 규정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가치는 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음 속으로 들여오는 경고하는 소리를 듣는다.
바로 그 소리가 동물로서의 인간이다.
공진화의 전일적 그물망 속에 있는 인류 정신이다.

[3]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노동 운동이 젠더, 농촌, 이주민의 문제를 나중으로 미뤘기 때문에 빠르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배제하는 성과 속에 오히려 토막나고 스스로 제한 되었다고 생각한다.

동물권이 인권과 다른 특별한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는 결국 인간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바로 거기에 위계적 함정이 있음을 생각하지 못한다.
마치 자본주의 기독교의 가치관처럼 인간에 대한 우월주의가 있다.
그러나 동물이 있기에 인간이 있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다.

동물권이 배제되는 곳에서는 언제나 가난한 국가, 가난한 이들의 착취가 당연시되고 비가시화 된다.
나중으로 미루기에, 토막나고 스스로 제한된다.

[4] 혐오와 해방

결국 혐오 문제다. 혐오이기에 공기처럼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이는 인권이 먼저 있고 그래서 국민의 권리가 있는 것인데, 차별과 혐오를 통해 그 반대가 상식이 된 것과 같다.
마찬가지 원리로 동물권을 배제한 인권에 대한 인식은 어떤 차별과 혐오 구조에 콘센트가 꽂히는 일이 된다.

계속 동물권과 인권이 구분 되는 것 같다면, 어쩌면 위계에 익숙한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여자같다'는 식의 표현에 들어 있는 억압과 차별의 정당화를 이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짐승같다'는 표현도 그런 작용을 한다.

그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이 여성의 해방인 것처럼,
혐오 속에 목소리 없는 존재들이 바로 동물이 되었다.
특정 사회의 언어를 규정하고 그 밖의 목소리를 비가시화 시킨다. 그것이 혐오다.
동물 해방은 그에 대한 저항이다.

[5] 동물되기

젠더, 직업, 농촌, 인종과 국적에 대한 혐오에서 해방되는 일들이, 모두 동물 해방이다.
이때 동물해방에 필요한 것이 '동물되기'다.

예를 들어 '퀴어'는 이상한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그러나 스스로 퀴어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이를 뒤집었다.
마찬가지로 동물되기에는 그러한 전복의 힘이 있다.

동물 혐오 속에서 '동물'이라는 개념 속에는 단순히 비인간 동물 종들을 뜻하는 생물학적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다른 존재이기에 그들다움을 훼손 당해도 되는 가치 판단이 바로 '동물'이다.

어느 육식 동물도 다른 동물의 그 종다움을 훼손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육식이 아니라 혐오 폭력이다.
그것이 가시화되지 않게 하는 가치판단이 '동물'이란 개념에 들어가 있다.

그에 대한 저항은 정의로운 엘리트들이 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억눌리는 그곳에서, 벽을 세우고 분리한 그곳에서,
같은 삶의 자리로 연대하는 것이, 저항의 근원이다.

"동물이 되자"는 것이 저항의 원동력이다.
여기서 동물권 운동은, 우리가 동물이 될 권리다.
바로 그 "우리"가 동물의 자리에서 동물로서의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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