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녹색전환공론장 '기후위기 시대 지켜야할 것들' 토론문)
(준)직접행동DxE 연구모임 연구활동가 꼬까새


먹거리 문제에서 다뤄져야 하는 육식

이번 IPCC 6차 보고서에서 기후 붕괴의 운명을 결정할 기한이 10년은 앞당겨졌다고 발표되었는데요, 예를 들어 설명드리자면, 이게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절반으로 감축하지 않으면, 이번 세기 안에 부산이 실제로 물에 잠긴다는 의미에요. 그런데 사실 현실이, 이전 보고서 예상치 보다 더 심각한 상황일 건, 기후위기 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미 짐작하고 있던 것이었는데요, 왜냐면 애초에 과학자들은 보수적인 수치로 발표를 하거든요. 이걸 다시 말하자면, 지금 발표된 보고서 보다 현실은 더 큰 위기의 상황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중에서도 축산업은 이미 예전부터, 단일 산업으로는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는데요, 육식소비는 세계적으로 계속 증가하고 있어서 더욱 심각한 상황이에요. 온난화의 원인으로 축산업이 1위가 된 건, 생명의 문제를 단순히 시장경제 논리로 접근하는 게, 얼마나 큰 위험을 초래하는 지를 반증하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고 대상화된 생명의 문제는 바로, 비인간 존재에 대한 일종의 혐오 문제입니다. 기후위기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라면, 제1원인은 어떻게 무엇을 먹는지의 문제겠죠? 당연히 기후위기 문제에서 제1원인이 가장 먼저 다뤄져야 되는 건 상식입니다. 그럼에도 지금처럼 육식의 문제가 잘 다뤄지지 않고 있는 건, 그게 비가시화 시키는 혐오 문제라서 그렇습니다.

먹거리를 돌아보는 이 시간은 그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육식과 건강한 농업의 연관성이 충분히 드러나도록 더욱 첨예하게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기후위기는 전 지구적 농업 생산성에도 큰 타격을 주게 되는데, 애초에 한국의 인구수에 맞춰 자급자족하긴 이미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한국은 사료를 통해 열대림의 파괴에 기여하면서 기후위기를 가속화 하고 있어요. 육식은 채식보다 10배 이상의 토지, 물, 화석연료를 소모합니다. 고기의 가격이 싼 거? 가난한 국가의 주민들의 삶터를 파괴하고, 산업형 농업의 노예 노동으로 내몰았기 때문이에요. 그 싼 가격, 그 이상으로, 그들이 먹을 식물마저 빼앗은 거에요. 오랜 기간 합법이었던 노예제가 지금은 적합하지 않다면, 지금 전세계 인구수를 감안했을 때, 육식 또한 전혀 적합하지 않습니다.

먹는다는 행동은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자연이 건강해야 인간이 건강하다고 하죠. 그런데 혹시 거기서도 위계적이고 이분법적인 인식이 있는 거 아닌지, 좀 더 섬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먹거리’라고 부를 때, 자연스럽게 인간이 ‘주체’이고, 인간에게 주어진 ‘객체’인 자연을 건강하게 ‘이용해야한다’라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라, 서로가 주체가 되는 상호작용이 있고, 먹는다는 행동은 상호적 관계 속에 있는 하나의 형태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한 실험이 있습니다. 두 개의 울타리를 쳐놓고 하나는 동물이 풀을 먹는 것처럼 계속 풀을 깎아 교란하고, 다른 하나는 그냥 놔둡니다. 시간이지나면 교란 없이 그냥 놔둔 곳은 소수의 종이 우점해서 다른 식물들을 밀어냅니다. 우리는 이걸 두고 방해가 없으면 적자생존이 나타난 것이라고 배워요. 그런데 자연의 상태는 오히려 풀을 지속적으로 깎는 울타리와 비슷하죠. 거기서는 종 감소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는 오히려 동물이 있는 곳에서 식물 사이의 공존도 건강해진다는 걸 뜻합니다. 곧 먹는다는 행위는 동물이 식물에게 하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복잡한 관계망 속에 있는, 상호 주체적인 공존이란 의미입니다. 마찬가지로 옐로우 스톤 국립공원에서, 상위포식자인 늑대를 복원하니까 파괴된 생태계가 회복된 사례도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관계의 관점에선 모두가 연결된 동시적 주체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이 지금 하고 있는 건, 사실 관계 안에서의 먹는 행동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저 탐식, 곧 위계적인 착취입니다. 육식뿐만 아니라 채식을 하더라도, 음식이 아닌 학대이며, 파괴입니다.

위계성의 다른 사례가 있는데요, 우리 사회는 장애인이나 사회적 약자들을 수동적 존재로만 인식해요. 그런데 가치생산의 현대 사회에서, 그들도 마찬가지로 존재 노동, 가치 노동을 하며 함께 인간을 지키고 돌보고 있거든요. 우리사회는 그런 존재와 가치의 노동을 비가시화 하고 위계적으로, 다시말하면 생산성 논리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것처럼 우리는 먹는 행동에 있어서도 관계에서 평가하지 않고 위계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거죠.

단순히 목가적인 과거로 돌아가는 건, 답이 아닙니다. 과거 생태농업 사회의 결과가 현재라는 걸 깊이 생각해야 봐야 합니다. ‘가축화’ 속에 이미 위계적인 인식이 있습니다. 관계에서 볼 때, 복지농장 역시도 여전히 감금, 학대, 학살의 장소입니다. 불과 몇십년 전과 달리 우리는 왜 풀려 있는 개를 위험하다고 생각할까요? 되려 들개들은 늑대가 사라진 곳에서 생태적 기능을 할텐데요. 어쩌면 인간은 동물과 자연에 대해 공존이란 이름을 붙여 놨을 뿐이지, 실상은 인간에게 귀속시키는 것만을 공존이라 왜곡하고 있는 게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사실 위계적 인식을 지녔음을 고백해야 해요. 고백할 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위계적 이분법에 대한 저항

토종씨앗 중에서도 철저히 비가시화 되고 있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바로 야생식물의 씨앗입니다. 우리는 잡초라는 이름으로, 이 땅의 생태에 적합하게 적응한 식물들을 쉽게 제거합니다. 공원을 조성할 때도, 인위적으로 병충해에 강한 외부 종들이나 국외의 식물들을 식재해요. 그 결과 함께 공존하던 다른 곤충들, 그리고 그 곤충들을 먹이로 하는 더 큰 동물들이 함께 줄어들고 있어요. 우리는 혹시 인간이 인위적으로 조작한 다양성만, 생명다양성으로 인식하고 있는 게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거 위계적 이분법이잖아요.

인간이 개입한 또 다른 사례가 있는데요, 한국에서 하루에 유리창 충돌로 죽는 조류만 2만 명 이상인데, 그런데 고양이는 이보다 2배 이상의 위협이 된다고 보고되고 있어요. 늘어난 고양이에 의해 이미 취약한 도시생태계의 야생동물들의 삶은 더욱 큰 파괴를 당하고 있다는 거죠. 이건 자연적인 약육강식이 절대 아닙니다. 인간이 그런 구조를 선별하고, 책임지지 않고 있는, 명백한 인재입니다. 피해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다양성은 위계적인 지배를 벗어나서 관계맺음을 회복하는 곳에서부터 얻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관계의 회복이 있는 곳에서, 다양성은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일종의 표지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비인간 존재들과의 관계 회복이 먼저 있고, 토종씨앗 복원도 그 맥락 중 일부로 위치해야 할 것입니다.

위계적 이분법에 대한 저항으로서 여성성의 회복, 굉장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남성도, 임신할 수 있습니다, 트랜스 남성이 있죠. 또한 XX염색체가 재생산 혹은 수용과 동일해 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성은 특정 규정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여성으로 정체화 하는 모든 여성들의 연대 속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거에요. 이는 여성에 대한 억압과 대상화에 저항하는 주체라고 할 수 있겠죠. 가부장적 위계에 저항하는 주체요. 그렇다면 그 저항은, 위계적 이분법에 함께 저항하는 다른 주체들과의 연대가 돼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반려동물 시장은 거대한 소비문화로 자리 잡고 있는데요, 거기엔 현대인의 감정 만족을 위한 소유의 정당화가 있습니다. 귀여움으로만 소비되고, 들개라며 혐오하는 모습은, 반려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 규정과 억압, 소비의 대상화, 입니다. 이게 축산동물, 실험동물을 구분하고 규정하는 위계와 분리되지 않아요. 그리고 다시, 여성에 대한 규정과 억압, 소비의 대상화와 분리되지 않겠죠. 모두가 해방되지 않으면, 아무도 해방될 수 없습니다.

국내에 국한된 문제의식의 한계

한편, 농업은 한국 역사 속에서 언제나 빈곤 문제를 핑계로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해왔습니다. 어떤 분야라도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은데, 당연히 도덕적인 이유에서도 그렇지만, 결국 자연 생태계뿐만 아니라 사회 생태계를 망가뜨리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농업 기본소득’은 그동안의 기울기를 줄이는데 분명 도움이 될껍니다. 그런데, 산업형 농업과의 가격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면, 결국 농업인구의 감소는 자연스러운 일이 되겠죠. 산업형 농업이 싼 이유는 그것이 만드는 오염과 착취에 대해, 온전한 세금이 매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이에 대한 세금의 확대가 반드시 말해져야 합니다. 이때 세금을 확대해서 가격이 올라가잖아요? 그건 오히려 전체 기본소득과 빈민의 지원으로 활용될 수 있는 거죠. 또한 여기서 중요한 게 있는데, 그러한 재분배가 단순히 한국인에게만 국한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세금 감면과 대출에 있어서 이득을 보는 것은 농장주이지 노동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은 싼 값의 노동으로 비한국인들을 쓰고 있죠. 이주민들이 한국의 돈을 빼앗아 가는 게 아니죠. 이들이야 말로 한국의 생산을 책임지고 있는 이들이고, 그에 합당한 임금을 받아야 하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높은 스펙의 고연봉 외국인들에게는 큰 불만이 없다는 걸 돌아봐야 합니다. 혐오, 고백해야 합니다.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잖아요. 지원체계에 있어서 실제 노동자에 대한 지원으로 개편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 비한국인의 노동이 단순히 한국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현재 인구수를 감당할 먹거리는 자급자족만으로는 불가능한데, 현대 세계화 구조 안에서 한국은 사실 국외의 자연파괴와 노동착취를 수입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건강한 농업으로 국내 자급률 높이는 거, 이에 대한 저항이 될 수 있겠죠. 그런데 외국의 산업형 농업, 숲을 파괴한 농업에 대해 되돌려 줄 수 있는 세금 설정과 재분배가 없다면, 언제나 파괴하고 착취한 수입 농산물이 더 쌉니다. 결국, 지출을 더 줄이고 자유시간을 더 늘리는 방법은, 언제나 식량 자급이 아니라 수입 농산물이 될 수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국가차원에서 지원하는 것이 국내에만 국한된다면 제안하신 내용은 성공하기 어렵겠다 싶습니다. 국외 문제에 대한 책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싼 수입 농산물은 이웃나라의 착취입니다. 국외의 착취의 문제가 바로 한국의 문제라는 선명한 문제 인식이 필요합니다. 농업에 대한 운동은 이것을 빼고 얘기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https://greenduck.kr/post/t7Pq5YUbyR2aP9qawDYL

[녹색오리] 녹색전환 공론장 #5: 기후위기 시대에 지켜야 할 것들 - 무관심의 세상 뒤집어 보기

❤️‍🔥 생태위기와 무관심의 사회에서 꼭 지켜야 할 것들로서 기후위기와 돌봄, 농업·먹거리, 여성주의를 엮어내고자 공론장을 마련하였습니다.  기후위기 시대에 달라져야 할 생활양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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