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해방은 가까운 동물부터 시작되는 것이 효과적인가?
예를 들면 반려동물이라고 부르는 동물들 말이다.
장애 해방은 어떤가? 장애는 스펙트럼이다.
나에게 가까운 장애, 곧 노화나 시력이 나빠지는 것 등, 사회에서 어느 정도 받아들여진 장애부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전체 장애 해방으로 이어지는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이미 훌륭한 자본주의 시스템의 좋은 도구들이 되었다.
반려동물의 해방부터 시작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애초에 우리가 이분법적으로 완전히 나눈 것으로부터
동물은 비존재화 된 이들이다. 자본주의를 위해 감금, 강간, 실험 등으로 완전히 도구화 되어 있거나, 자본 밖에 있을 경우 대멸종의 속도로 파괴되고 있다.
반면 반려동물은 사회에서 어느정도 받아들여진, 다시말해 정상성 규정 속에서 이용해 먹을 수 있는 바운더리로 들어와 있다. 노화나 시력과 같은 경우도 정상성규정 속에서 그러하듯 말이다.
가시적인 곳에서 일어나는 것은 해방보다는 인간화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언제나 종 차별주의의 벽에서 좌절을 경험한다. 애초에 모든 종의 인간화는 가능하지 않다.
그렇기에 마치 낙수효과처럼 언젠간 모두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무기로 그 좌절을 망각한다.
종차별주의와 분리된 동물 보호는 결국, 내가 위계적 혜택을 보는 위치에서 나에게 의미 있는 이들을 자본주의 시스템 안으로 들여오려는 것과 크게 다름없는 일이 되고는 한다.
물론 그런 일들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철저히 위계적이고 시혜적 입장이며, 동물 해방과는 다소 다른 것임을 확실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런 일들이 필요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동물 해방과 완전 따로 떨어져 기능한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노인 복지나 시력 교정 시장의 발전에 이바지 하고 있는 것이 장애 해방과 동일한 아닌 것과 같이, 위계적 시혜를 해방이라 이름 붙이더라도 그것이 동물 해방과 동일한 것이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위계다. 어쩌면 내가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를 아껴주는데 왜 여성혐오냐고 하는 가부장제의 소리와 비슷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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