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체주의에 빠져 있는 우리는 인도적이란 것도 오해하고 있다.
왜곡 시키지 않은 한국 돼지(멧돼지)의 경우 1㎢당 2.8명이 살고 있다.
이는 척박한 환경에서의 최소 수치다. 겨우 이 정도를 보장하는 것도 인도적이라고 하기엔 부족하다.
1㎢당 2.8명 보다 적은 수가 살아도 될 정도로 혹은 더 많은 2.8명이 살 수 있는 1㎢가 늘어날 수 있도록 있도록 국립공원 수준으로 파괴를 억제하는 보호지 확충이 바로 인도적 축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단일 종을 위한 배타적 지역을 확보하는 것은 인도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사례를 생각해보면 알 것이다. 그 천적이 자연스럽게 확보될 수 있는 환경이 인도적인 것이다.
아마도 현재 다른 천적이 사라진 상황에서는 자연스럽게 늘어날 야생 집늑대(들개) 무리의 보호가 인도적 축산일 것이다.
집닭의 경우는 어떤가. 닭은 애초에 한국 환경에서 살 수 없다. 그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에너지는 적색야계 답지 않다.
애초에 한국에서 집닭은 감금 없이 생존할 수 없다. 감금이 인도적인 것이 아니다. 애초에 닭은 한국땅에서 축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다른 측면으로 집닭, 집돼지, 집소, 집늑대, 집고양이 등 장애에 가둔 것*(장애에 가둔 것과 장애동물은 같은 것이 아니다)은 인도적일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그 비극이 이어지지 않도록 생식기관을 제거하고 책임을 지는 생추어리, 그 과도기적 상황만이 집동물과 인간이 맺을 수 있는 인도적 상태다.
평균 수명은 인도적인 것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서구 문명 이전의 부족 생활을 할 때의 인간은 평균 수명이 적었을 것이다. 그 부족 중 일부를 잡아다가 대리임신을 시키는 용도로, 섹스 도구로 쓸 용도로, 장기를 대신 키우는 용도로 감금하고 장애에 가두고 강간으로 산업화 한다면 그것을 우리는 인도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실제 사례를 예로 들자면 흑인을 노예 사냥 해와서, 그들의 영아 사망률이 줄어들고 새로운 대륙에서도 안정적으로 개체수가 늘었다고 말한다면 노예 산업은 인도적인 것인가? 그런 것은 위계적 배제에 근거한 문화일 뿐이지, 인간의 동물성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다. 곧 인도적인 것이 아니다.
인도적 축산은 환경의 보호와 그 시스템을 통한 공통의 누림이 산업이 되게 하는 산업이다. 다시 말하지만, '인도적'이 붙는 이상 축산의 대상은 가축이 될 수 없다. 다만 인간이 이용하는 동물이 축산에서 말하는 '축'이다. 이 산업은 단지 개체의 이용이 아닌, 관계의 누림을 나누기 위한 공적 가치 산업이다. 자본 이윤 산업의 대척점에 위치하는 것이다.
인도적 축산이란 것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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