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돼지는 아니지."
비웃는 소리를 들었다.
완전히 도구화 된 곳에서의 연대는 조롱거리가 되곤 한다.
생존 자체가 전쟁과 다름없는 상황인 이들은 오히려 더 가볍게 여겨지는 것 같다.
일방적으로 짓밟는 학살에 대한 투쟁은 인정받기 보다는 단순한 동정의 대상화가 되는 것 같다.
사람들은 흔히 동물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 자신은 동물과 분리시켜 자동적으로 우월한 위치에서 자아를 충족한다.
대량 살상 도구에 맞서는 것이 몸뚱아리, 목숨 자체라고 해서 그것이 투쟁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돼지는 언제나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집돼지(인간의 이용을 위해 멧돼지에게 인위적 장애를 만든 이들이다)들은 지금도 목숨을 다하여 소리를 지른다.
총을 쏘고 화학탄을 던지는 이들에게 돌을 던지며 저항한다고 그것이 전쟁이 아닌가.
그것은 전쟁보다 더 근본적이고 거대한 전쟁 아닌가.
그들은 전존재로 무력감을 짊어지기도 한다.
그들의 심각한 우울증과 정신장애 역시 전존재의 투쟁이다.
싸움 역시 그 전존재의 투쟁의 일부일 뿐이다.
그들의 정신장애는 생산노동보다 가장 근본적인 존재 노동을 다시 선명히 호소한다.
멧돼지를 단순히 먹는 기계로 여기는 것 같다.
그들도 어디가 위험한지 이해하고 있으며 문화로도 전해준다.
그럼에도 죽음 같은 생존 앞에 일방적으로 인간이 설정해버린 국경을 넘는 것이다.
그들의 독립운동은 포기되지 않았다.
프리덤 만세 만세 만만세.
예언(豫言)이 아닌 예언(預言)이 있다.
예언(預言)은 세상에 가려진 말이 맡겨진 것이다.
감히 자격도 없는 우리가 세상의 비극 앞에 영광의 투쟁을 전파하고 연대한다.
영광은 높은 건물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낮아진 곳, 냄새나는 곳, 버려진 곳에서 눈물나게, 혹은 눈물도 말라버리게 묵묵한 그것이 영광이다.
그러니 영광은 언제나 비웃음 당하고, 정상성 규정에서 밀려난다.
그러나 세상의 높은 것이 태양이지만 오히려 그 역시 영광의 그림자일 뿐이다. 연대는 그 영광에 대한 예언이고 전언이다.
(집)돼지는 아니라고?
우크라이나인-동물과 나-인간-동물을 분리하지 않고, 피해자의 피해 받을만 함이 아닌 가해자의 가해를 말하기 위해 그 자리에 서 있다면, 오히려 전존재의 투쟁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동정과 연대는 같은 것이 아니다.
예컨대 전쟁 난민은 그저 불쌍한 것도 매우 대단한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의 가려졌던 투쟁과 연대가 다시 함께 이어져 갈 시간이다.
구호(救護)와 연대는 동시적일 수는 있더라도 구분되는 것이다.
연대 속에서, 투쟁으로부터 맡겨진 말을 전한다.
여기서 우린 비웃음 당함에 연대한다.
비웃음 당함은 무서운 것이 아니다. 함께 비웃음 당하지 못하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그 연대로부터 전언을 전한다.
NO WAR! 더 이상 죽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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