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간 동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 동물권은 믿지 않는 편이다.
인간은 다른 종에 대해선 알 수 없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기에 나를 투사하기에 좋은 관계를 소유할 수도 있다.
내가 해주는 것에 반응해주는 것을, 나의 소유로 누릴 수 있다.

비인간 동물은 배신하지 않는 게 아니다.
그들은 인간중심적인 사회 내에서 그런 게 가능하지도 않을 정도로 열등에 위치할 뿐이다.
그들 역시 최선을 다해 가능한 배신을 한다. 다만 철저히 일방적 결정권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인간에게, 곧 나에게 절대 권력이 있을 뿐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권력과 지배는 비가시화 된다.
그래서 자신은 오히려 희생하고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돕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가부장제 아버지도 가족을 위해 자기 인생을 희생한다. 그 영향력 밑에 위치된 어머니도 서로가 서로를 돕는다. 그 안에서 권력과 지배는 비가시화 된다.

그런데 가부장제의 이분법 안에서의 그런 관계보다 극단적으로 절대적 권력이 인간에게, 나에게 있다.
그만큼 비가시화 되어 있기에, 문제에 대한 지적을 마치 자기 존재에 대해 지적한 것인 양 환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게 바로 권력이다.


왜 다른 동물에게는 밥을 챙겨주면서, 저기 저 동물에게는 밥이라도 챙겨줘야 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
저기 노숙하는 동물을 동물이라 부르면 폭력인가?
아니. 반대로 그렇게 생각하는 이가 위계적 이분법 안에서 판단하고 있는 것 아닐까? 너도 나도 동물이다.

노숙하는 비인간 동물과 노숙하는 인간 동물 사이에서 차이가 생기는 건, 타인, 인간 또한 개념으로 생각할 뿐 진정한 그의 동물적 생명을 보지못해서 인 것은 아닐까?
오히려 노숙인을 동물로 볼 수 있는 만큼 개념으로서의 대상화가 아니라, 진정 그를 인간 동물로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마찬가지로 노숙하는 비인간 동물에게만 작동하는 감정이라면, 어쩌면 거기엔 나를 향해 비인간 동물을 소유시키는 대상화가 있던 것은 아닐까?

내 영향력 밑에 있는 관계가 아닌, 인간 동물 사이에서 사랑, 슬픔, 분노, 갈등, 화해 등 상호존재의 관계란 게 이해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동물 사이에서만 잘 이뤄 질 수 있는가?
그건 정말 권력 관계, 나를 향한 소유의 관계는 아니었는가?

인간을 동물로서 만날 수 있는 만큼, 비인간 동물 또한 동물로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동물로서 만날 수 없는 만큼, 비인간 동물에 대해서도 동물로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을 동물로서 만날 수 있는 만큼, 개념으로 대상화된 인간이 아니라 드디어 인간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 무너진 세상에서 나 짐승이 저기 저 짐승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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