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인간중심적으로 동물을 대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모든 동물들은 자기 종 중심적으로 주체가 되어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
문제는 인간중심적인 관계란 것이 자연스럽게 위계와 차별과 동일시 되는 학습이다.
인간은 동물이다. 문제가 없다. 그러나 위계와 차별은 동물이 아니다. 죽음이다.

인간에겐 인간에게 주어진 방식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동물이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관계성을 파괴하는 문명이 또한 인간의 것이었다면, 관계성의 파괴에 저항하는 연대의 문화 또한 인간의 동물적 본능이다.
곧 인간답다는 것은 관계성을 파괴하지 않는 무결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인식하고 지속적인 저항을 해내는 것이다.

한편 그 작업은 공동체성 없이는 유지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인간종의 특성이다.
그러한 작업을 위해서는 인간들로 구성된 전환 공동체의 회복이 없어서도 안되며, 동시에 범동물적 공동체성의 회복 또한 이뤄져야 한다.
그 공동체성이 저항의 힘이다. 다시 말해,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목표가 아니라 저항의 수단이다.

비인간으로서의 인간이란 문명을 인간으로 환원하는 것 뿐만아니라, 인간을 특별히 숭고한 존재로 환원하는 것도 포함한다. 
위계라는 죽음에 저항하는 투쟁은 밥을 먹고 자는 것처럼, 혹은 노동을 하고, 공동체로서 육아를 하는 것처럼, 인간으로서 보편적인 것, 다시말해 동물적인 것이다.
따라서 목표가 무엇인지를 정리하자면, 환원된 허상에서 벗어나 그 대수롭지 않은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동물로서의 인간을 회복하는 것이다.

사진은 들개의 모습이다.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공간을 보장하고 함께 그들의 건강을 돌보는 행위는, 위계를 극복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동물로서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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