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처럼 취급한다는 말은 비인간 동물을 열등으로 보는 혐오다.
동등한 존재라면 '취급'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보통은 '대한다'라는 단어를 쓸 것이다.
(비인간)동물이라는 개념은 차이일 뿐이다. 이때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종차별주의를 반대한다는 말은, 절대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종의 차이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차이라는 것엔 차별해도 되는 근거가 없다는 의미다.

이때 종차별주의는 인종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현대 인간이 의미 있게 생각하는 존재는 자신이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다.
따라서 나의 반려동물의 사료를 만들기 위해, 가난한 나라의 인간들의 삶터가 파괴당해고 그들의 삶이 망가져도 괜찮은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경제세계화의 현실이 정상이 되면서 자연스레 비가시화된다.

잠깐 따로 설명하자면, 실재하는 어떤 동물은 따로 떨어진 '개념'이 아니다. 흙과, 물, 공간과 생명의 그물, 그리고 서로 간의 관계성이 유기체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존재'다.
그러니 어떤 동물이나 숲이 파괴된다는 것은 그런 유기체적인 관계성이 파괴된다는 의미다.
그러니 그와 닿아 있는 인간이 함께 파괴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반면 육식동물의 육식은 생태적 관계성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풍요롭고, 함께 파괴된다.
따로 떨어진 비인간 동물만의 파괴는 존재하지 않는다.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유기체적 관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실제 세상에 눈을 가리는 경제세계화의 자본주의를 본능적으로 활용하여, 자기중심적으로 누릴 수 있는 쾌락을 누리고, 책임은 회피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가난한 인간보다 자기 반려동물이 더 귀하면서도, 경제세계화 자본주의가 그것을 비가시화시켜 주기때문에, 인간과 동물은 다르다는 식의 변명이 가능해진다.

그렇기에 동물이라는 관점에서는 종차별주의는, 또 다른 관점에서는 똑같은 것이 인종주의로 나타나는 것 뿐이다.
유기체적 관계성의 측면에서도 그러하고,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한다는 기만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그 두 측면은 또한 하나 통합된 죽음의 관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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