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같은 것이 아니다.
외냐하면 거기에 그가 있었고,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우리의 몸을 말한다. 몸은 관념이 아니다. 3차원의 몸은 시간과 공간의 자리가 있다. 여기 몸이 있었다.

그가 있었다.
학살의 장면이란 건 어찌보면 다 비슷하다. 그런데 그 장면 중에서 같은 것이라고 얘기한다면, 전에 본적 있는 정말 같은 것이 같은 것이다.
다 다르다. 어떻게 같을 수 있는가? 우리가 개별로 구분하기 어려운 대학살 장면에서, 같은 것이 여기서도 죽었고, 저기서도 죽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무례한 지 알 것이다.
같은 종의 다른 반려 동물의 죽음에 대해, 우리는 같은 것이 죽었다고 말하는가?

우리가 있었다.
여기에 있는 증언은 효과적인 보도 같은 것이 이니다.
같은 학살의 현장에 있어도 여전히 나는 안전한 모순 속에서, 그 벽을 넘어 우리가 되었다. 그렇게 공동체가 되는 시간을 증언하는 것이다.
구조적 죽음 속에 죽임 당함은, 역설적으로 죽임당해선 안된다는 것을 드러낸다. 바로 그가 해방의 주체다.
그러나 죽임 당한 그가 해방자가 될 수 있는 것은, 해방의 공동체가 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가 해방자가 될 수 있는 곳은, 그가 해방자라고 고백하는 내가 그 고백을 통해 해방자가 되는 곳이다. 그곳이 바로 해방 공동체다.

몸이 있었다.
내가 구경하면서 정의로움을 생각한다고 공동체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거기 삶이 삶인 것이 박탈 당하는, 그래서 죽음이 죽음인 것이 박탈 당하는 대상화의 현장에 있었다.
거기에서 기도로 우리는 한 자리로 만난다.
몸이 있었다. 대상화 되지 않은 생각은 개념이 아닌 몸이 된다.
몸이 있었다. 몸이다.
내 몸 한 곳이 아프면 거기가 아프다고 한다. 몸이 있어 이 한 몸에서 여기가 아프다.

목소리가 없는 이들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있다. 내가 있다. 우리가 있다. 기도가 있고 몸이 있다.


#비질 #생태순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