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오물로 덮어버린 존재가 있다.
오물을 뒤집어 씌운 이들이 오물을 뒤집어 쓴 이들을 혐오한다.
대상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행위라기보다는 어쩌면 '존재되기'다.
내가 정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다.
한 번 우산 씌워주는 게 아니라 함께 비를 맞아야 보이는 세상이 있다.
오물은 두렵고 무서운 것이 맞다.
누구도 지옥 같은 오물에 닿고 싶지 않다.
오물을 피하고 싶어 완전히 소진된 그들과 만날 때,
우리는 함께 오물 묻은 존재가 된다.
고작 조금 몇 방울 튄 냄새에 대중교통 안에서 눈치가 보인다.
그들에게 지옥을 뒤집어 씌워 쾌락을 즐기는 이들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그런 것이다.
내가 정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제거되는 존재들이 드러나는 것이다.
만남이 한다.
그러나 씻어내지 않는 건 비극에 대한 또 다른 대상화일지도 모른다.
오물을 씻어낼 수 있다면 씻어내는 것이 맞다.
다만 그때, 오물로 취급 당하는 이들이 씻고 싶을 때 씻는 꿈을 꾸며 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들의 비극을 내 죄책감으로 이용하는 게 아니라 애도할 수 있다면,
그때는 내 정의감으로 분노하는 게 아니라, 드디어 우리가 분노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이 오물을 씻어내는 행동을 하듯, 해방을 위해, 그 씻음을 위해 드디어 행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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