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제비들은 주로 재개발 예정지나 그와 비슷한 곳에서 산다.
가난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이 있는지도 아닌지도 중요하지 않고,
그들의 삶이나 죽음, 내몰림이 별대수롭지도 않은 일일 뿐인 존재들이 있다.
그렇게 존재마저 가난한 이들에겐 당연히 보상하지 않아도 된다.
발이 달렸으니 어디가서 살지 않겠냐고?
여기가 환경이 좋아서 사는 것이 겠는가.
갈 곳이 없다. 해고가 살인이고, 철거가 살인이다.
중간에 어디 머물수 있으면 가난이겠는가. 다시 돌아올 돈도 없다. 기약 없는 이주도 죽음이다.
가난이란 그런 거다. 단순히 덜 먹고 사는 게 아니다.
내몰리는 이들은 마을의 풍경이 되어온 오래된 이들이다.
돈과 혐오는 합법이라는 폭력으로 풍경이란 연약함을 철거한다.
마을은 단지 건물이 아니다. 관계이자 시간이다.
마을이 사라진다.
죽음 위에 똑같이 성형된 모래성이 세워진다.
가난한 이들이 불쌍해서 돕는 것으로 생각하면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모래성 위에 있던 우리가 풍경을 만나고, 여전히 우리 모두가 연결된 풍경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풍경의 철거에 대해 투쟁한다.
서로의 가난이 만나고 나눠진다. 사랑이 투쟁이다.
단지 철거의 문제로만 이해된다면 결국은 끊임없는 실패일 것이다.
이 땅 모든 미등록인 이들과 생명의 풍경들로부터 해석될 때, 우리는 드디어 만나게 된다.
결국 눈감게 될 그때까지 퍽 열심히도 살다가, 우리는 단칸방 한 이불 속에서 잠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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