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애니멀피플] “개식용만 반대? 소, 돼지는?”이라고 묻는 이들에게

 

“개식용만 반대? 소, 돼지는?”이라고 묻는 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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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내용은 위 글에 대한 반박글이다.

[1]
"개는 다른 가축하고 달라서 밀집 사육이 불가능한 사회적 동물이다."

-다름: 개, 소, 양 등은 줄을 채우지 않아도 가축화가 가능했다. 그러나 대표적으로 돼지 같은 경우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오히려 돼지가 더 가축과 어울리지 않는다. 
-밀집 사육: 사육은 감금이다. 또한 학살로 이어진다. 이것이 허용되는 동물은 없다.
-사회적 동물: 오히려 무리 생활을 하지 않을 수록 밀집에 어울리지 않는다. 개는 무리 생활을 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축산동물들도 무리생활을 하는 종이다. 그러나 농장 환경이 적합하지 않기에 부리를 자르고 이빨을 뽑는다. 개에게만 적합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개에게만 하면 안되는 일이 아니다.

[2]
"다른 가축과는 다르다. 개는 수만년 동안 사람과 동반자로 살아오는 과정에서 반려동물의 지위를 획득했다."

-다름: 가축의 시작인 유목 생활은 다른 동물들 본래의 서식처에서 인간이 함께 살았던 경우다. 그곳은 개의 서식처이기도 했다. 오히려 돼지가 본래의 서식처와 다른 곳에서 살게 되었다.
-수만년: 개를 포함한 가축화의 결과가 공장식 축산이다. 수백만년 동안 인간은 전기를 사용하지 않았었다. 단순히 기간이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가축화 자체가 정당한지 재고되어야 한다. 또한 육식은 더 많은 식물을 파괴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인구 급증의 시대에 육식 자체가 재고되어야 한다. 더 많은 동물과 식물을 파괴하고 인간에겐 식량부족을 초래한다.
-동반자: 개의 동반자 지위는 또 다른 위계이자 이분법이다. 한편 동반자이기에 다른 동물의 감금과 학살이 불가능 한 것이 아니다. 다른 동물의 감금과 학살이 가능하기 때문에, 개도 가능해 지는 것이다. 곧 위계적 이분법 자체가 문제다.
-반려: 반려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위계와 억압의 정당화가 가능해진다. 첫째는 반려라는 이름으로 소유하는 것이다. 아이-엄마의 위계적 관계가 된다. 개 뿐만 아니라, 인간이 집에서 인간의 감정에 맞게 훈련시키면, 다른 동물들도 거기에 맞춰 학습된다. 안정적으로 살고 있는 들개가 있다면 오히려 그들의 서식처를 보존할 필요가 있다. '반려'의 프레임은 공존의 문제를 제한한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만족감이 자리한다. 둘째는 다른 동물과의 위계적 이분법이다. '획득'이라 칭하는 그의 표현에서 이분법적 우월감을 알 수 있다.

[3]
"우리나라 결식아동을 돕자는 운동에 아프리카에는 더 심하게 굶는 아이들도 많은데 호들갑 떨지 말라는 것과 다름없다."

이것이 교묘한 프레임인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문제가 아니다. 내가 선택한 이를 살리기 위해, 다른 이 아홉을 죽이고 있다. 애초에 누구를 더 도울까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도움을 선택하는 문제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누군가를 제외하거나 비가시화 했기 때문이다.

[4]
곧 글쓴이의 입장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차라리 종교와 같은 신념의 문제다. 기사의 글은 그의 교리인 것이다.
결국 그의 논리는 낙수효과일 것이다. 낙수효과가 현실인가? 아니다. 그것은 위계를 가진 이들이 바라봤을 때의 현실이다. 서 있는 곳이 다르면 풍경이 달라진다.
위계를 가진 이들 주변은 더 나은 세상이 되어갈 테지만, 그들이 제외한 존재들, 눈감은 존재들에게는 더 거대한 고통이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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