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조적 혐오와 존재적 혐오
구조적인 혐오와, 혐오를 기본값으로 하는 사회에서 태어난 존재로서의 혐오는 구분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내가 한국의 노동 운동을 하고 있으면 노동혐오에 자동적으로 맞서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한국인들만의 노동 운동에 의해 외국인 노동자들의 노동은 낙수효과처럼 얻어질 것이라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노동운동은 바로 그런 낙수효과의 거짓과 싸우는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게다가 세계 경제화를 통한 노동 착취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는다.
선진국의 노동자가 권리를 보장 받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 거대한 노동착취가 동원되었고, 그것은 양극화를 통해 유지되는 시스템이다.
결국 한국인만의 단절된 노동 운동이 자동적으로 구조적 노동혐오를 극복하는 일이 되지는 않는다. 다시말해 또 다른 노동혐오다.
이렇듯 존재 자체로 혐오에 가담하게 되는 혐오가 존재적 혐오다.
존재의 혐오는 구조적 혐오의 원인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혐오의 존재임을 고백할 수 있을 때에야, 함께 극복하는 연대가 가능해진다.
그렇기에 존재적 혐오를 구분하는 일이 중요하다.

[2] 관계적 혐오
존재적 혐오는 원하지 않게 가지고 태어나는 질병처럼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이를 과도하게 구조적 혐오와 동일시하거나 혹은 책임 회피를 하는 것에는 또 다른 혐오인 관계적 혐오가 있다.
관계는 너와 나로 이뤄진다. 서로 간에 동시적이다. 그러나 관계적 혐오는 나만을 주체로 생각하게 한다.
상대는 "내가 맺어주는" 관계의 시혜자가 되어, 거기서 우월적 만족감을 얻는 것이다.
우월적 만족감의 피해자들은 자신 역시 그러한 위치가 되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구조적 혐오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동시적인 관계가 된다면, 그 혐오에 함께 휩쓸릴 수밖에 없다.
세월호 유가족, 혹은 퀴어를 구성원으로 둔 비퀴어인 가족 등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억압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열심히 제공하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관계적 혐오다. 
혹은 상대방이 끊이 없이 울게 하면서 그것을 챙겨주는 것에서 만족감을 얻는다.
결국 구조적 혐오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혐오에 기여한다.

[3] 위계의 종교성
그러나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라 볼 수 없다. 
제국주의적으로 한국인들만의 노동을 생각하게 되는 것도 단순히 인간이 이기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지식이 있으면 안다고 생각하고, 이상을 향해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그게 맞다고 생각하는 종교성이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이다.
그런데 인간은 문화에 의해 더 큰 영향을 받는 종교적 동물이다.
곧 그렇게 위계를 만들어 구분하는 제국주의 문화가 인간을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종교처럼 제국주의적 사고의 근거는 제국주의 자체다.
제국주의는 위계적 이분법의 가부장적 사고다. 탈가부장제의 문화가 필요하다.
관계의 위계성도 가부장제에 의해 강화되고, 탈가부장제에 의해 극복된다.
동물권은 탈가부장제의 문화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위계의 사회에서 동물은 절대 동물 존재 자체가 아니다. 동물혐오의 위계다.

혐오의 근본적 차원은 동물권의 근본에 대한 이해를 통해 극복 가능해진다.
혐오의 존재적 차원은 동물 존재에 대한 동시적인 전일성으로서 극복 가능해진다.
혐오의 관계적 차원은 나와 동물과의 관계를 다시 위치 지음으로써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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