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말복이다. 먹을 것과 관련된 날이니, 단순히 동물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의 문제가 되기 쉽다.
그런데 좀 더 본질적으로는, 오늘은 대상화의 자리가 강화되는 날이다.
강간, 감금, 학살은 본래 일상이다. 오늘은 그 동물됨의 말살을 조장하는 날이다.
그러니 나와 비인간 동물의 위계적 분리 속에서, 나의 자리를 얼마나 비인간의 자리로 옮길 수 있느냐를 고민해야 한다.

어쩌면 “동물을 먹지 맙시다”, “채식 합시다”라는 메시지는 공론장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더 효과적인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공론장은 애초에 자격 있는 이들의 자리다.
차별주의자들은 거기에서 채식하는 사람들을 비웃음으로 사회 안으로 수용해준다.
기껏해야 시혜다. 약자들의 내몰림마저도 개념화한다. 자리의 위계가 더욱 세련되어 질뿐이다.

효과적인 전략만 있지, 차별의 몸은 여기에 오지 않는다. 그저 좋은 개념으로 소비된다.
동물을 먹지 않는다고 해도, 동물을 먹는 이들과 같이 이 날을 그렇게 소비한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한통속으로 묶을 수 있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단순히 "채식 합시다"는 말이라면, 일상 속에서 할 말아닌가?
동물됨의 말살을 특별히 조장하는 날에는 특별히 다른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대중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는 그 대의는, 어쩌면 대중에 속할 자격이 없는 존재들의 제거가 조장되는 날에, 그러한 조장을 정상화하는 일이다.

권력(공론장)으로 안으로 들어가 목소리를 내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권력 바깥으로 제거되는 곳에서 함께 제거되는 몸이 되는 일이다.
삶과 죽음의 존엄, 동물됨을 말살하는 곳에서, 지금도 누군가는 완전한 소진과 우울, 무기력의 몸으로 투쟁한다. 지금도 누군가는 마지막 비명의 몸으로 투쟁한다.
그 투쟁의 비가시화를 조장하고 있으니, 이 날에 전할 메시지는 단순히 어떤 행동이 옳은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 전에 함께 비가시화 되는 그 몸의 연대를 전해야 한다.

몸이다. 몸.
그러니 누군가는 우울의 몸을, 누군가는 비명의 몸을 전한다.
직접행동을 하자는 게 아니다. 연결 된 몸으로서 나에게 온 몸을 말한다.
어제 말복 전날 시정을 걸었다. 여기 시장에서 비웃음 가운데 있었다. 여기 내 몸은 비웃음의 몸이다.
무력하고 우스우며 지혜롭지도 영향력 있지도 않다.
그렇게 우리가 여기에 있다. 당신들은 오직 우리가 되는 몸 만은 막아내지 못했다.

(사진 : 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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