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에 전국 가축 폐사 51만마리…양식장 어류도 이틀 사이 40만마리 넘게 폐사]
https://www.google.com/amp/s/m.khan.co.kr/local/local-general/article/202408090918001/amp
어마어마한 수치다. 그러나 단지 이런 수치를 강조하는 것은 결국 동물복지의 정당성으로, 이는 다시 폐사의 위험성을 낮추는 기업화, 대형화된 스마트축산단지라는 동물복지로 귀결된다.
6월 11일부터 8월 8일까지 가금류가 47만5000명 죽임 당했다고 하는데, 하루에 죽임당하는 닭의 수는 하루 293만명이고, 같은 기간에는 1억 7천 3백만 명이 살해당했다. 

그러나 폭염은 이것이 아니더라도, 비교적 쉽게 드러나는 대규모 죽음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다양한 죽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폭염에 수온 상승 여천천 물고기 떼죽음] 
https://www.ulsanpress.net/news/articleView.html?idxno=533335
[“이게 다 떼죽음 물고기” 베트남서 물고기 수십만마리 폐사, 무슨 일?] https://biz.heraldcorp.com/view.php?ud=20240504050041
[나무에서 떨어진 멸종위기 원숭이들…45도 폭염에 85마리 떼죽음] https://www.news1.kr/world/latin-america/5423106

그런데 대멸종 수준의 죽음에서 폭염의 영향은 결국엔 인간이 미치는 영향의 일부일 뿐이다.
[안성 금석천, 폐수 오염으로 물고기 떼죽음] https://www.kyeonggi.com/article/20240808580201
[브라질 상파울루 강에서 물고기 떼죽음] https://imnews.imbc.com/replay/2024/nwtoday/article/6618769_36523.html
[일본 해변 물고기 떼죽음…“먹지 마세요”] https://news.kbs.co.kr/news/mobile/view/view.do?ncd=7838579

그렇기에 폐사에'도' 초점이 맞춰지는 것과 폐사 혹은 살처분에 더 특별히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대멸종의 학살에 대한 문제가 충분히 다뤄지는 가운데 폐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 것이 순서이다. 그러한 순서를 바꿀 수 있는 위치성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결국 대형화, 기업화하여 안전하고 도덕적인 스마트한 복지, 스마트한 죽음의 포장에 기여한다.

동물권을 얘기하고 동물해방을 얘기하면서도 인간의 소유권 속에 들어 있지 않는 70% 원주민들의 대멸종에 대해서는, 도축으로 죽는 이들의 0.3%도 안되는 수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제비 수 18년새 100분의 1로"…한국서도 동물 사라져간다] https://www.yna.co.kr/view/AKR20221012175300530
[지난 50년간 동물 개체수 70% 사라졌다] https://www.popsci.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106

해양오염으로 어업을 못하는 곳에서는 그 치명적 오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생태계가 복원된다고 한다.
기후위기 문제로 퉁치고, 동물복지로 퉁쳐봤자, 더 집약된 노예화와 원주민 학살은 줄어들지 않는다.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위계, 곧 차별과 혐오가 있기에 학살과 개발이 산업이 되는 것이다. 개발과 산업이 있기에 오염도, 기후위기도 오는 것이다.
그 순서를 바꿔서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눈 앞의 자기 정의를 위해 고통 포르노를 소비하고, 허울 좋은 복지 노예제 얻어내는 만족감으로 원주민 학살 앞에서 시혜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동물혐오를 할 수 있게 된다.

동물해방은 단지 비인간 동물의 해방이 아니다. 비동물로부터의 해방이다. 학살과 개발로부터의 해방이며, 위계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렇기에 인간과 동물은 다르지 않다는 말도 틀렸다. 그 단어엔 이미 인간으로서의 동물이 배제 되어 있다. 동시에 비인간 동물의 동물성도 배제되어 있다. 동물은 감금, 착취, 학살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이 동물성이다. 인간과 동물은 다르지 않다고 하는 말은 인간의 도덕성을 기준으로한 쾌고감수성에 대한 얘기일 때가 많다. 동물성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위계에 근거한 정체성으로부터 동물성을 되찾는 일이 해방이다. 예를 들어 단지 지역명으로서의 한국과 국가로서의 한국은 다르다. 한국이 지역명이라면 모든 존재가 한국의 원주민이다. 한국은 국민의 것이 아니다. 더 나은 국가를 만드는 것은, 모두가 평등하지만 어떤 이들은 더 평등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위계다. 
동물해방은 동물성의 되찾음이며, 그렇기에 동물해방은 국가로서의 한국을 해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다시 한번 순서를 똑바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위계가 차별과 혐오이며, 이것이 개발과 산업을 만든다. 그 결과들의 일부를 우리가 마주하고 있다. 위계->개발과 산업->개별 학대, 이 순서를 바꾸어 반대로 개별 학대의 문제로 만드는 것이 시혜적 위계다. 오히려 한국 해체 안에는 이미 개별 학대의 문제가 들어있다. 인간이 비인간 도와주는 일이 아니라, 이미 원주민 동지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주민 동지라면 이미 한국 국민의 정체성이 아니다. 동물로서의 인간이 국가에 맞서 동물의 세상을 되찾는 것이다.
물론 한국 해체 역시도 위계에 대항하는 하나일 뿐이다. 다만 그것은 단지 개별 학대를 멈추라는 시혜적인 입장일 수 없다. 동물성을 되찾기 위한 해방운동은 한국 해체보다 급진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자본주의 욕하고 사회주의 필요하다는 것 정도가 아니다. 국가를 무너뜨리는 것과 같이 자본을 무너뜨리는 불법적, 반사회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러한 근본이 없는 해방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변명할 수 있는 시혜성, 곧 혐오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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